msv 임팩트레터 no.73 관찰의 힘과 디자인





인간의 경험은 깊고 풍부하다. 
우리가 관찰조사에 집중하는 이유.

인간의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상호작용들이 차곡차곡 쌓여 경험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각 개인이 맞닥뜨렸던 상황은 모두 다르다. 이 지구상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일생동안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단연코 한 명도 없다. 이런 점에서 <경험의 함정>을 쓴 로빈M 호가스는 경험이란 개인적이면서도 삶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한 개인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는 수년에서 수십년의 경험들이 응축되어 반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터 디지털 기기에 노출되어왔던 Z세대가 스크린 기반 메뉴 구조에 익숙한 반면, 60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어르신은 화면 앞에서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또한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사람과, 사고로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은 동일한 시각장애인이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

 

한 사람, 또는 특정 그룹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그 사람들과 보내야 한다. 관찰과 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던 내면의 깊은 생각에서 사람의 경험에 대한 퍼즐이 맞춰진다. 그래서 관찰한 각 사람들의 경험을 분류하고 조합하여 공통된 특징을 발견해 낸다. 그리고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좌식생활을 하는 분이 버튼을 누르기 위해 사용하는 긴 막대기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는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근육병 사용자의 핸드폰 첫 화면에서, 뇌성 마비 장애인의 스마트 리모컨에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원하는 ‘독립성' 이라는 공통점을 뽑아낸 것처럼 말이다. 이번 임팩트레터에서는 우리가 만나서 관찰하고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통해 얻은 몇 가지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김병수 미션잇 대표




01
좌식 생활을 하고 가진 분과 뇌병변 장애인에게 냉장고는?


지금 여러분이 집에 있다면 잠깐 방바닥에 앉아서 현관까지 앉은 상태로 몸을 움직이며 가보자. 정수기 버튼을 어떻게 누를 것이며, 요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또 어떻게 꺼낼 것인가? 대략 난감한 상황일 것이다. 이렇게 20여년을 생활한 분이 있다. 이분에게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는 방식은 비장애인과 사뭇 다르다. 겨우 손을 쭉 뻗어 냉장고 중앙에 있는 손잡이를 열고 내부를 보여준다. 참고로 냉장고는 양문형으로 좌측이 냉동실이고 우측이 냉장실이다. 그나마 이런 냉장고라 다행이지 최근 나오는 상냉장 하냉동 구조는 냉장실 이용이 더 힘겨워진다. 이분에게 상단은 보관창고나 다름없고, 하단이 주로 쓰는 구역이다. 김치나 계란 등 본인이 직접 꺼내서 매번 먹는 반찬과 식품들은 아래쪽에 위치한다. 위쪽은 모두 활동지원사가 보조할 때 필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거나, 유통기간이 오랜 것들이 차지한다.


한편 뇌병변 장애인으로 혼자 거주하시는 분은 반대로 아래쪽은 가끔 꺼내는 것만 놓고, 위쪽은 자주 먹는 것을 놓는다.  코어 근육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쭈그려 앉거나 몸을 숙이는 자세가 불편하다. 그래서 더욱이 아래쪽 칸은 비워두거나 정말 가끔씩 꺼내는 음식일 때만 보관한다.


냉장고 윗칸 사용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랫칸에 자주 먹는 물건들을 보관한다. ©미션잇

이 플라스틱 막대가 누군가에게는 별 물건이 아닐 수 있지만, 좌식 생활을 하는 분에게는 방 안의 버튼을 누르고, 빨래를 꺼내는 유용한 삶의 도구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제약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해결방안이다.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1 <이동>




02
청각장애인 청년이 지하철 탑승 전에 항상 하는 일은?


출근길 지하철. 한 청년이 바삐 지하철을 탔다. 열차의 문이 닫힌 뒤 주변의 시선이 갑자기 그에게 쏠린다. 영문을 모르는 청년은 주변의 시선을 느끼자 당황해 한다. 옷매무새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급하게 확인한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이 핸드폰을 가리키자 그제서야 빠르게 핸드폰 측면 버튼을 수차례 누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깜빡하고 볼륨을 최대로 켜놓았던 한 청각장애인 청년의 이야기다. 이 청년은 그 날의 에피소드 이후로 외출 시에 습관적으로 핸드폰 측면에 있는 볼륨 버튼을 낮추는 행동을 반복한다. 인터뷰를 해보면 꽤 많은 농인, 난청인들이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나 골목길 등에서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타인에게 불편감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 볼륨 버튼을 습관적으로 줄이게 된다. ©미션잇




03
저시력 시각장애인 청년이 시계 알람을 음성으로 들리도록 설정한 이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시력 시각장애인 청년의 핸드폰에서 소리가 크게 울렸다. “12시". 나는 알람을 귀로 듣는 게 더 빠르고 편해서 그런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를 물어보니 더 깊은 의도가 있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 중 상당수는 보이스오버 기능보다 핸드폰의 확대 기능을 활용하여 눈 가까이에 핸드폰을 가져가 글씨를 확인 한다. 그런데 한 번 상상해보자. 만약 여러분이 지인과 대화하고 있는데, 지인이 대화 도중 핸드폰을 꺼내 눈 가까이에 가져간다면 여러분은 지인을 어떻게 생각하게될까? 분명 ‘이 사람 나랑 그만 대화하고 싶은가?’, 혹은 ‘나랑 보내는 시간이 지루한가?’라고 여길 것이다. 지인이 장애인임을 알더라도 이런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게 될지 모른다. 저시력시각장애인 청년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대화 중에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게 매우 우스꽝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시계 알람을 소리로 해놓으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저시력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물건의 정보를 가까이에 가져가서 확인한다. 정보가 색상으로 명료하게 대비가 되어 있으면 상대적으로 구분하기 쉽다. ©미션잇




04
청각장애인 사용자와 태블릿 PC 위치의 상관관계


한 청각장애인 부부의 가정에 방문했더니 태블릿 PC가 거실에 놓여 있었다. 사실 주목하여 보지는 못했다. 가끔 충전을 위해서나 필요할 때 쓰기위해 거실에 태블릿을 놓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청각장애인 부부에게 태블릿 PC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알고보니 아파트 안내 방송이나, 문 밖에서 나는 소리 등을 자동으로 감지하고 소리가 문자로 변환되는 것들을 매번 확인 하기 위해 거실 가운데 놓은 것이었다. 요즘 처럼 폭우로 인해 아파트 지하에 있는 차를 모두 빼야 한다던가, 화재로 긴급 대피 상황이 발생한다던가. 여러 돌발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살면서 부지기수이지만 위험신호는 대부분은 음성정보로 전달된다. 누군가의 외침, 안내 방송 등으로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태블릿으로 확인하는 정보는 단순한 메시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brandon-romanch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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