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모여서 만드는 큰 걸음
고아라 발레리나, 청각장애
인터뷰 임나리
사진 영상 김은혜
고아라 님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하나 더’라는 생각이다.
발레리나로서 ‘한 바퀴만 더’, ‘일 초만 더’,
‘한 걸음만 더’ 해보자고 되뇌었던 말들이 모여,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인터뷰 중인 고아라 님 ⓒMissionit
어렸을 때부터 어머님께서 구화(口話, 입술의 움직임과 얼굴표정으로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발성연습을 통해 음성언어를 습득하게 하는 교육법)를 가르치셨죠? 대학은 장애인 전형이 아닌 일반 전형으로 입학하셨고요. 발레를 포함해서 많은 일들에 도전해 오신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도전의 연속인 것 같아요.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저희 어머니께서 계속 구화 교육을 시키셨는데, 그건 어린 아이인 저에게도 도전이었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어머니한테도 도전이었고, 서로서로가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발성에 있어서도, 제가 지금의 목소리랑 예전의 목소리가 다른데, 그걸 바꿔준 것도 동생이었어요. 발성법도 도전이고, 사실 지금도 발음을 조금 더 잘하려고 공부하면서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 무용을 하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꿈을 이뤘지만 또 하고 싶은 일이 되게 많거든요. 그런 거에도 도전을 해야 하니까, 매일 매일이 도전의 연속인 것 같아요.
발레를 하면서 좋았던 순간들은 언제였나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한 바퀴 돌다 보면 ‘한 바퀴만 더’, 뭔가 버티고 있으면 ‘일 초만 더’, 이런 생각을 반복하게 돼요. 한 번 더, 한 바퀴만 더, 일 초만 더, 한 걸음 더... 이런 사소한 1이라는 숫자가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한 번에 멀리 나아가 있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모여서 나중에 큰 걸음을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의 제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된 것 같고요. 그런 점이 저한테는 좋은 것 같아요. ‘하나 더’라는 생각이 저를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한테도 되게 감사해요.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중요한 자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외국의 경우에는 발레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실력만 보는 게 아니라, 발레를 하기에 알맞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심지어 가족 중에 병력이 없는지도 살펴보더라고요. 그런 걸 떠나서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이 친구는 조금 더 다듬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는 반면, 처음부터 천재적인 실력을 보여주는 친구들도 있고, 굉장히 다양한 것 같아요. 신체적인 조건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발레의 테크닉을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노력도 하고 있는지 등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 같고 하나만 따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예술에 있어서, 타고난 재능을 노력으로 넘어서는 일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력을 통해서 얻게 되는 성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천부적인 재능을 가져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처음부터 발레를 잘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고, 그런데 결국 스스로 노력해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됐고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주변에도 노력을 통해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노력을 하다 보면 나중에 운이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주파수를 보면서 음악을 익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시나요?
처음 들어보는 음악의 경우에는 그 음악의 빠르기, 속도, 높낮이 같은 특성을 어느 정도 알아야 되기 때문에 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틀어서 봐요. 그런데 그건 참고 대상이 될 뿐이지, 그걸 보고 박자를 맞추고 나중에 그걸 보지 않은 채로 음악을 들어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지금도 가끔 새로운 음악을 받으면 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보는데, 참고 대상이 될 뿐이에요.
그렇다면 음악을 익히고 거기에 맞춰서 춤을 추는 노하우가 있으세요?
노하우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보면 박자가 대충 눈에 보이니까 몇 번 보면서 듣고, 그 다음은 프로그램을 보지 않은 채로 한 번 연습을 해봐요. 그렇게 하면 도움은 돼요. 그렇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무대 컨디션에 따라서 음악이 다르게 들리기도 해요. 무대의 크기, 방음이 잘 돼있는지 안 돼 있는지, 야외인지 실내인지, 그런 것들에 따라서 음악이 되게 다르게 들리거든요. 그래도 얼추 음악에 맞춰서 시작과 끝을 알게 되더라고요.
발레, 현대무용이 낯선 사람들도 많은데요.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까요?
일단 기본적인 에티켓은 있어요. 안무가의 기획 의도 또는 안무 의도가 있고, 팜플렛을 보면서 그런 의도와 줄거리, 내용을 파악하면 돼요. 그건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고요. 발레의 경우 감상 포인트는 <호두까기 인형>이나 <백조의 호수> 같은 유명한 작품은 스토리와 동작이 짜여 있잖아요. 그건 계속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토리 위주로만 감상을 해도 충분해요. 그런데 현대무용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안무나 기획 의도를 알고 관람한다고 해도, 오래 전공한 저로서도 되게 어려워요. 안무 의도나 기획 의도가 딱딱 맞아떨어져서 ‘아, 이건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작품이구나’라는 걸 이해하게 되는 것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더라고요. 작품과 음악이 서로 다른데 그것이 고의적인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어요. 작품의 의도를 알고 보는 게 기본이지만, 그래도 되게 애매모호하거나 어려운 경우가 가끔 있더라고요. 그냥 어느 정도 내용은 파악하고 관람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발레’, ‘청각장애’ 외에 고아라 님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저는 그냥 당찬 고아라, 모델 고아라, 무용가 고아라, 요리 잘하는 고아라, 밝은 고아라, 그런 여러 가지들을 설명하는 게 저인 것 같아요.
어떤 무용가가 되고 싶으세요?
일상이 예술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예술이 일상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무용가로서 활동하고 싶어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일상을 반영해서 작품을 만들고도 싶고요. 그 반대로 예술처럼 일상을 살아내는, 그런 삶을 사는 무용가로 살고 싶어요. 지금도 충분히 그런 삶을 살고 있지만 앞으로 조금 더 연구를 해서 활동을 해보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당찬 고아라, 모델 고아라,
무용가 고아라, 요리 잘하는 고아라’로
설명하는 그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다양한 모습들이 모여 ‘고아라’라는
한 사람을 이룰 뿐이라고, 자신은
‘그런 가능성을 가진 고아라 자체’라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예술을 통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점에서 하고 싶으신 작업, 무대가 있나요?
지금까지 제가 배워왔던 작품이나 안무 경험, 또 새로운 안무를 통해서 작품을 만들어낼 용의는 있어요. 그 중에서 제가 가장 흥미 있고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요. 청각장애인 혹은 농인들이 모국어로 쓰는 게 수어잖아요. 수어를 가지고 그걸로 움직임을 확대시켜서, 또는 수어를 활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아직까지 수어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졌다고들 하지만, 주변 청각장애인이나 농인들은 피부까지 와 닿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저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고요. 저는 예술인이고 무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어 자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움직임을 확대시켜서 하나의 무용 작품으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 예술 활동을 통해서 수어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게 저의 역할인 것 같아요.
고아라 님에게 장애란 무엇인가요?
신체적인 장애를 떠나서, 마음의 상처나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진짜 장애인 것 같아요. 제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어렸을 때는 ‘나는 안 되나 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들리지 않으니까 이렇게 설명을 하면 되고 또 다른 방식으로 바꾸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거든요. 장애라는 건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그것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장애인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휠체어를 타는 청년도 있고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적장애 등 다양한 유형의 청년들이 계실 텐데요. 제가 아직은 이렇다 할 조언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위치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한 가지 말씀은 꼭 드리고 싶어요. 청년이라는 건 젊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젊으니까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겪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지금 청년이니까 그런 과정을 겪고 있고요. 그냥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안 해서 하는 후회보다 하고 나서 하는 후회가 더 적다고 하잖아요. 저도 ‘무용 말고도 모델을 진작 해볼 걸’ 생각하는 것처럼요.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을 때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한 번뿐이니까.
일반학교에서 비장애인 학생들과 같이 지내며 성장하셨잖아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접점에 계셨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늑대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늑대 소굴에 버려진 소년이 있었는데, 속세의 사람들이 그 아이를 발견하고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적응을 못 한 거예요. 늑대 무리에서 익힌 오랜 습관이 있어서 사회에 적응을 못한 거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구화 교육을 받았지만, 중간에 저랑 똑같은 친구들하고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러다가 일반학교에서 통합교육을 받게 됐어요. 그때부터 저는 늑대 소년 같은 처지가 된 거죠. 비장애인 학교로 가면서부터 제가 장애가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것 같아요. 비장애인 친구들하고 지내다 보니까 되게 이질감이 느껴졌던 거예요. 그때가 일곱 살이었는데, 어린 아이인데도 ‘내가 장애가 있구나, 못 듣는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똑같은 친구들하고 지냈으니까 몰랐고요. 그런 상태로 컸었고, 그래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적응을 하면서 비장애인 사회에서 자란 거예요. 나중에 수어를 배우게 됐는데, 수어도 저한테 필요한 언어가 됐어요. 제가 아무리 음성 언어를 잘 발화한다고 해도 듣는 거에는 아직까지 한계가 있는데, 수어는 눈에 보이는 언어잖아요. 수어를 배우면서부터 저는 농인 사회와 비장애인 사회를 마음껏 넘나들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만나는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죠. 제가 차기작으로 수어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면, 작품을 보는 관객 분들이 수어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주면 좋겠어요. 그런 활동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저도 그런 활동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겠죠.
청소년기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고아라 님은 어떠셨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너는 그냥 너야.’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단어는 인지적인 단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굉장히 와 닿았어요. 청소년 시기에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춤을 추게 됐고, 부가적으로 모델 활동을 하고 있고, 이렇게 음성언어를 쓰고 있고, 강연도 하고 있고... 그런 다양한 제 자신을 가지고 있잖아요. ‘아, 나는 그냥 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용도 하고 음성언어도 쓰고 수어도 할 줄 알고 무대 활동이나 강연도 하고, 그런 가능성을 가진 고아라 자체구나’라고 생각되더라고요. 사람들 각자가 다 그 사람 자체인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정체성이라는 건 굉장히 일시적인 단어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냥 나는 고아라라는 사람이고, 고아라라는 사람 밑에 부가적인 설명이 있는 거지, 그냥 저 자체인 것 같아요.
삶에서 발레가 차지하는 부분이 굉장히 클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발레를 할까’라는 생각도 하시나요?
그런 생각도 하죠. 지금 충분히 춤을 추고 있지만 그건 제 컨디션이 허용할 때까지 계속할 수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무대에서 빨리 내려올 것 같지는 않다는 예감이 들어요. 춤을 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제가 또 춤을 좋아하기 때문에 빨리 그만둘 것 같지는 않아요. 발레 같은 경우는 30대 초반만 돼도 무대에서 내려오는 경우가 많던데, 현대무용은 여든 살 아흔 살이 되도 춤을 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더라고요. 저도 그때가 되면 발레만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어느 정도의 발레의 움직임은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만약에 무대에서 내려온다면, 제가 오랫동안 다듬어온 춤으로 여유가 생겼을 때 그걸 공유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오랫동안 춤을 춰왔기 때문에 춤에 대한 지식의 여유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 걸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누고 싶어요. 내가 가진 여유가 있을 때 그걸 나눠주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고아라 님의 인터뷰 전문은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2호 <직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